◆ 여행 일자 : 2014년 2월 22일 토요일(무박 1일) · 촬영 장비 : SONY NEX-5T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 죽지에 부리를 묻고 /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있다(…)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이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 그곳에 가기 위하여 /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ㅡ 신용목, 「새의 페루」부분
계획했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 웃을 일 하나 없이 우울의 연속이었던 요즘,
시 한 편을 읽은 후 온갖 지붕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새 조차도 아니라서
날아갈 수는 없으니 버스라도 타고 떠나자. 그게 내가 삼례+전주 당일 여행을 결심한 이유였다.
집이 일산이라서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6시 30분 무렵에 시청역 부근에 도착했다.
출발 전까지 시간 여유가 많아서 근처 탐앤탐스에서 아메리카노 2잔과 머핀을 사서 먹었다.
가이드는 꽃분홍색 패딩을 입으신 여자분이셨는데,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환한 웃음이 아름다우셨던 분. :) 6시 50분에 2호차 버스에 올라탔고, 7시에 출발했다.
첫 코스는 삼례 문화예술촌이었다.
1920년대 일제가 양곡창고를 짓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수탈해갔다.
양곡창고는 해방 후 농협 창고로 쓰였는데,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삼례역이 이전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완주군은 폐허가 되어가던 이 창고를 농협으로부터 사들여 2년여 준비과정을 거쳐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삼례문화예술촌은 1920년대에 지어진 창고 6동과 1970년대 농협이 새로 지은 1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짧게는 40년에서 길게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이 창고들은 비주얼미디어아트갤러리,
책박물관, 책공방북아트센터, 디자인박물관, 김상림목공소, 문화카페 등으로 변신했다.
비주얼미디어아트갤러리의 작품들. 빛을 이용한 영상 매체와 회화를 결합한 기획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사진 찍기 좋은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많았다.
책 박물관에서의 한 컷.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용됐던 교과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신기했다.
삼례읍 삼례리 일부 지역과 후정리·해전리, 익산시 춘포면 일부 지역을 관할하는 삼례 성당을 배경으로 한 컷!
김상림목공소의 나무로 만들어졌는데도 역동적인 사람들과 문화카페 갤러리의 입체파 스타일 사람들.
삼례 문화예술촌을 뒤로하고 두 번째 코스이자 메인 코스인 전주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풍남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성 안으로 들어온 일제 상인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는 한옥.
한국의 전통적인 색감과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풍경들.
어느 처음엔 한 덩어리였을 바람 강물이 교각 사이를 지나며 물결을 얻듯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결을 얻는다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무늬,
ㅡ 신용목, 「붉새」부분
을씨년스러운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바람을 찍으며 붉새의 시구를 생각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여러 후기들에서도 호평을 받고 전주 출신인 직장 상사에게서도 추천받은
<베테랑 칼국수>에서 칼국수와 만두를 먹었다. 들깨와 고춧가루, 김가루의 조화가 고소하고 담백했던
칼국수 국물은 마음에 쏙 들었지만 국수 가락과 만두가 내 입맛에는 짠 편이어서 아쉬웠다.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 국수를 만다 //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ㅡ 신용목,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부분
나는, 우리는 국수를 먹으면서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을 건졌을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누구의 얼굴을 생각하게 될까.
전주에 가서는 풍년제과의 초코파이를 꼭 먹어봐야 한다 들었다.
풍년제과의 초코파이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 뒤의 나.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다섯 개를 사서 한 개를 서울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먹어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달지도 않고 안에 들어있는 크림과 잼의 조화가 인상적이었으며,
간간이 씹히는 호두 알갱이도 고소했다. 개당 1,600원이라는 비싼 가격이 아쉽긴 했지만
생각 보다 맛이 괜찮아서 앞으로도 종종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서도 살 수 있고, 인터넷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드립 커피 한 잔 내려서 같이 먹어봤는데 그야말로 꿀-맛♥.
<아프리카 수공예품 공정무역 망고>의 소품들.
부엉이의 시간을 비추는 조명 두 개.
곰돌이 인형은 우두커니 앉아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을 지켜보고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전동성당.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달팽이 표지판. "풍경을 마음에 담으면서 느릿느릿 걸어가세요."라고 속삭이는 듯한.
남부시장 안에 위치한 청년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가던 전통시장에 2,30대 젊은 청년 장사꾼들이 창업을 했다.
곳곳에 감각적이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았다.
청년몰 구경을 끝내고 역사 탐방길 앞에 당도했다.
봄에 꽃이 만개했을 때 천천히 오르면 좋을 만한 길.
서울에 도착했다. 치맥을 먹으며 회포를 풀고 짧고 긴 여행을 끝냈다.
메마르고 메말랐던 감성에 색감과 여유를 가득 충전하고 돌아왔다.
국제 슬로시티 전주 한옥마을 곳곳에서 마주쳤던 달팽이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짐이 좀 무거우면 어때. 좀 더디면 어때. 달팽이의 속도와 인내심으로 느릿느릿 꾸준하게 걸어가다 보면
내가 원하는 꿈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인용 서적 : 신용목,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작과 비평사, 2010